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평양 전쟁/배경 (문단 편집) == 일본의 대미 개전 준비 ==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41년 일본에선 미국과의 [[총력전]]을 구상하고 준비 과정과 예상 결과를 파악하기 위해 젊은 엘리트 인재들을 모아 [[총력전 연구소]]를 설립해 연구하게 한 바 있다. 연구진들이 내린 결론은 당연하게도 '일본의 필패'였다. 연구진들은 일본의 공업 생산력과 자원, 특히 [[석유]]의 생산 및 수송 능력[* 미국으로부터 석유를 공급받을 수 없으니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지역의 유전지대를 개발해서 일본 본토로 수송하는 형태를 가정하였다. 이 [[총력전 연구소]]를 분석한 논픽션인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2989142|쇼와 16년 여름의 패전]]'의 저자 '이노세 나오키'는 책에서 이를 두고 '구멍뚫린 양동이로 물을 퍼가는 식'이라고 표현했다.]을 볼 때 도저히 미국을 총력전으로 이길 수 없다고 정확히 판단하였다. 이 결과를 보고받은 [[도조 히데키]]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책상에서 이루어진 연습으로서, 실제 전쟁이라는 것은 제군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러일전쟁]]에서 우리 대일본제국은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이겼습니다. 그 당시에도 열강에 의한 [[삼국간섭]]으로 어쩔 수 없이 제국은 일어선 것이지, 이길 수 있는 전쟁이라고 생각해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은 계획대로 되지 않지요. 생각 밖의 일이 승리로 연결되어 갑니다. 따라서 제군이 생각하는 것은 책상 위 공론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어디까지나 그 의외성이란 요소를 고려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이 책상연습의 경과를 제군은 경솔하게 입 밖에 내서는 안 됩니다." 쉽게 표현하면 "그전에 한 전쟁도 어찌어찌 이겼잖아? 이번에도 될 거야." 인 것. 국가의 최고통치자가 이런 발언을 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일본군]]이 얼마나 전쟁에 대해 안일한 생각을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러일전쟁]]은 사실 러시아의 세력확대를 견제하기 위해서 미국과 영국 두나라가 일본을 내세워서 치른 대리전쟁에 가깝다. 또 하나 당시 러시아의 차르 정권은 [[피의 일요일 사건(러시아)|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도저히 전쟁을 지속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차르]] 입장에선 후방의 러시아 민중들 그리고 전선의 병사들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종전을 결정한 것이다. 만약 러시아가 이 모든 것, 심지어 발트함대의 전멸까지 무릅쓰고 최소 만주에서의 육상전이라도 속행했더라면[* 러일전쟁의 주요 야전인 랴오양, 타이쯔허, 펑텐 회전에서 일본군은 전투에서는 승리하였으나 러시아군의 주력을 섬멸하는 데는 실패했고 만주 주둔 러시아군의 전력은 종전 시까지 일본군 전력을 훨씬 능가하는 상황이었다.] 만주의 일본군은 고사했을 것이고 일본은 훨씬 불리한 결과를 받아들어야 했을 것이다. 포츠머스 강화회담에서 러시아가 강조했던 것도 자신들은 패전국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일본의 자뻑은 이런 전후 상황을 모두 무시하고 그저 우리 황군이 잘해서 이긴 것이라는 정신승리에 가까운 것이었다.[* 다만 총리라는 도조의 직위를 생각하면 우린 이제 망했다고 대놓고 얘기할 수도 없으니 적당히 둘러대기 위해 이런 말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는 이후 도조는 육군 내부 강경파를 상대로 미국과의 협상가능기간을 늘리느라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한다.] 더구나 일본은 '''[[미국]]이 제대로 빡쳐서 나올 경우, 얼마나 무서워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당장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장관이 [[진주만 공습]]의 성공을 보고받은 후 "어쩌면 우린 잠자고 있던 거인을 깨운 것인지도 모르겠군."이라고 독백을 한 것과 상당한 대조가 된다.[* 그러나 진주만 공습에 대해 해군 군령부(우리의 해군본부)에서는 반대했었다. 야마모토는 진주만을 공격하든 공격하지 않든 미국은 참전할 것이고 그럴 바에야 초장에 미 태평양함대를 격멸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결국 사임하겠다고 위협까지 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켰다. 이는 항명에 가까운 일이다. 당시 일본의 군사전력에서 육군은 형편 없었고, 해군은 세계 최강 수준이였다. 그러나 웃기게도 일본내에서 육군이 해군보다 우위권에 있었다. 당장에 [[2.26 사건]] 주도세력의 다수가 육군이고, 황도파니 통제파니 하는 계파들은 물론 관동군도 모두 일본 육군계파들이었다.(메이지시기 조슈파가 육군 건설을 주도하면서, [[세이난전쟁]] 이후 [[사이고 다카모리]]가 자결하며 세력이 약화된 사쓰마번이 주도한 해군보다 사실상 상위에 위치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총독]]직도 육군이 독점하는 직위였다.] 일본은 이미 1937년 [[중일전쟁]]의 늪에 빠져서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상황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적을 공격하는 것은 [[양면전쟁]]을 스스로 일으키는 무모한 행동으로, 군사학이나 병법까지 찾아볼 것도 없이 2:1로 싸울 때 어떤 편이 유리한지만 생각해 봐도 미친 짓이라 하기에 충분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미국]]도 [[유럽]]과 [[태평양]]에서 양면전선을 형성했고, 이기기까지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미국]]이니까''' 가능한 것이고 태평양과 유럽에서 필요로하는 군종이 다른점도 있었다.[* 미 육군의 주력은 유럽에서 작전했지만 해군의 주력함들은 태평양에서 작전했다. 대서양에서는 [[크릭스마리네]]나 이탈리아 해군같은 별 볼일 없는 해군만이 존재했고 동맹국인 영국이 혼자서 저 둘을 바르고 다녔으니... 물론 유보트가 설쳐서 미국한테 대량의 호위항공모함을 얻어가기는 했다.][* 게다가 독일과 일본처럼 제대로 된 동맹군 없이 독불장군으로 두개의 전선을 수행한 것도 아닌 데다가 위치상 본토가 공격받는 상황에 대해서 매우 여유로운 전쟁 수행이 가능했다.] 게다가 독일이 이미 ~~멍청하게~~ 소련을 침략하면서 동부전선으로 엄청난 전력이 투입되어 있기도 했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